
ELEMENTAL FRONTIER · 1화
타오는 새싹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자신이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싹에게 이름이 있는지는 몰랐다. 막 깨어났을 때 타오도 한동안 이름 없이 지냈으므로, 없을 수도 있었다. 타오는 쓰러진 가지 밑으로 얼굴을 다시 들이밀었다.
잎이 될 부분 두 개가 꼭 맞붙어 있었다. 그 사이로 흙 알갱이 하나가 끼어 있었다. 타오가 손가락을 내밀자 머리 위의 불꽃이 가지 끝에 닿을 듯 흔들렸다. 그는 얼른 고개를 낮췄다.
“그건 네가 털어.”
새싹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침인데 돌은 차가웠다. 타오는 양손으로 납작한 돌을 감쌌다. 손바닥의 열이 천천히 옮겨 가는 동안, 위쪽에서 철제 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타오.”
“찾았어요.”
“무엇을?”
타오는 돌을 내려놓고 가지 사이로 빠져나왔다. 불꽃 끝에 거미줄이 붙어 있었다. 루온은 그것부터 떼어 주었다. 타오보다 두 배쯤 큰 그의 어깨에서는 마른 솔잎 냄새가 났다.
“길을 살피랬지.”
“길도 찾았어요. 이쪽으로 가면 샘 아래예요.”
타오가 가리킨 비탈에는 오래된 뿌리가 세 줄로 드러나 있었다. 가장 굵은 뿌리 위로 샘물이 조금씩 넘쳤고, 그 아래에서 길이 갈라졌다. 왼쪽은 낮은 숲으로, 오른쪽은 고갯마루로 이어졌다. 가지와 덤불이 서로 얽혀 두 길 모두 중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루온은 허리에 매단 짧은 낫으로 머리 높이의 마른 가지를 눌러 보았다.
“여기만 열어도 아랫길에 빛이 들겠구나.”
타오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안에 새싹도 있어요.”
루온이 몸을 숙였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한참 들여다보더니, 새싹에 드리운 그늘을 손으로 짚었다. 가지의 그늘, 그 위 잎의 그늘, 더 위에 포개진 큰 나무의 그늘이었다.
“아직 저만하군.”
“곧 펴질까요?”
“해를 좀 보아야겠지.”
타오는 고향의 빈터를 떠올렸다. 낮이면 가운데 돌이 따뜻해져 작은 정령들이 그 위에서 낮잠을 잤다. 가장자리에는 어린 나무들이 있었고, 바람이 불면 잎마다 다른 소리가 났다. 타오는 그 소리를 흉내 내다가 모아에게 한 번도 닮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이곳에도 그런 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 개쯤. 새싹이 자라면 그 아래에는 더 작은 정령들이 누울 수 있을 것이다.
루온이 타오의 어깨를 돌려 세웠다.
“오늘은 물만 받는다. 흰 돌 안에서는 낫을 쓰지 말고.”
샘 둘레에 놓인 흰 돌은 모두 열두 개였다. 타오는 어제도 세었다. 북쪽에는 땅의 창들이 서 있었고, 동쪽에는 물의 깃발이 있었다. 능선 위로는 바람의 긴 끈이 펄럭였다. 이곳에서는 아침에 샘 위 큰 나무의 그림자가 흰 돌 끝을 지날 때까지 물을 받고, 길에 걸린 가지만 걷을 수 있었다. 칼을 뽑거나 살아 있는 뿌리를 자르면 다음 날부터 누구도 편히 물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모두 칼을 차고 와서는, 내려놓았다. 내려놓은 자리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타오도 짧은 검을 흰 돌 바깥에 놓았다. 다만 물통을 채운 뒤에는 돌 세 개를 주워 다시 가지 밑으로 갔다. 데운 돌 하나를 가운데 놓고, 양옆에 작은 돌을 받쳤다. 새싹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내일은 이걸 치워 줄게.”
그는 머리 위의 가지를 가리켰다. 그리고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다음 날 돌은 세 개 다 없어져 있었다.
타오는 물통을 내려놓았다. 한 손으로 가지를 들고 다른 손으로 낙엽을 뒤졌다. 따뜻한 돌도, 받침돌도 없었다. 새싹은 그대로였지만 그 곁에 낯선 손자국이 나 있었다.
“누가 그랬어?”
새싹은 어제와 똑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 정도는 말해 줘도 되잖아.”
“내가 옮겼어.”
타오가 돌아보자 땅 정령 하나가 뿌리 위에 앉아 있었다. 어깨에 돋은 작은 잎 사이로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발밑에는 타오가 찾던 돌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땅 정령은 돌 하나를 손등으로 두드렸다.
“뜨거웠더라.”
“따뜻하게 해 준 거야.”
“뿌리 위에 올려놓고?”
“이만한 돌인데.”
타오는 손을 벌려 크기를 보여 주었다. 땅 정령은 그 손을 보지도 않고 새싹 옆의 흙을 들췄다. 흰 실 같은 뿌리가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타오는 거미줄인 줄 알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루야.”
“누가?”
“나.”
땅 정령은 눌린 뿌리 아래로 손가락을 넣었다. 흙이 조금씩 부풀었다. 힘주어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받쳐 주는 모양이었다. 타오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 가까이 갔다.
“너는?”
“타오.”
“타오, 거기 발.”
타오는 얼른 물러났다. 그가 디딘 자리에 발뒤꿈치 모양으로 흙이 갈라져 있었다. 마루는 작은 나뭇조각으로 틈을 메웠다.
새싹 옆에는 오래된 나무의 굵은 뿌리가 지나갔다. 그 밑으로 더 가는 뿌리들이 엉켜 비탈을 붙들고 있었다. 마루는 한참을 만지다가 가까운 돌을 비탈 아래쪽으로 옮겼다. 위에서 다른 땅 정령이 받침돌을 들고 오자, 마루는 손을 들어 옆길을 가리켰다. 그 정령은 걸음을 돌렸다. 흰 돌 밖의 창 둘도 그 손짓을 보고 뿌리 밑을 비워 주었다.
“네가 치우겠다는 가지, 저 나무 거지?”
“봤어?”
“들었어. 네 선배 목소리가 커서.”
타오는 루온이 들었는지 샘 쪽을 돌아보았다. 루온은 물의 정령과 물통을 놓을 자리를 두고 이야기 중이었다. 이야기라기에는 손짓이 컸다.
“저 나무가 길을 다 막잖아. 잎도 너무 많아.”
마루는 가지 아래로 손을 뻗었다. 타오는 그가 새싹을 만지려는 줄 알았지만 손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검은 흙 속에 작은 빈틈이 있었다. 그 안에서 이끼를 이불처럼 덮은 땅 정령 둘이 자고 있었다. 한 정령은 팔을 뻗어 다른 정령의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마루가 그 팔을 살짝 옮겨 주었다.
“밤에 여기 바람이 안 들어.”
타오는 그들이 깨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가지를 조금만 치우면 되지.”
“어느 가지를?”
타오는 올려다보았다. 낮은 가지 하나를 치우면 그 위의 잎이 남았다. 그 위를 치우면 더 굵은 가지와 만났다. 저 높은 곳에 무엇이 사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전부 이렇게 남겨 두면 쟤는?”
그가 새싹을 가리켰다.
마루는 흙 묻은 손을 무릎에 올렸다. 잎 두 개가 아직 붙어 있었다. 마루도 한동안 그것을 보았다.
샘 위에서 물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세 번 났다. 큰 나무의 그림자가 흰 돌 끝에 닿았다는 신호였다. 마루는 일어나 흙을 털었다. 타오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마루는 잠든 정령들에게 이끼를 한 겹 더 덮어 주었다.
돌을 다시 가져갈까 하다가 타오는 그냥 두었다.
새싹 옆에 물이 고인 것은 그다음 아침이었다.
물이 샘에서 흘러온 길은 손가락 하나 너비도 되지 않았다. 타오는 가지를 들어 올린 채 바닥에 엎드렸다. 물은 새싹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작고 푸른 손 하나가 앞에서 흙을 긁고 있었다.
“거긴 나무가 있어.”
“알아.”
물 정령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머리 뒤로 흘러내리는 물결을 어깨에 둘러 묶고, 조개껍데기처럼 오목한 도구로 길을 파고 있었다. 허리에는 길이가 다른 끈 네 개가 달려 있었다. 셋에는 작은 돌추가, 나머지 하나에는 마른 갈대 매듭이 달려 있었다.
타오가 물길을 따라 쭈그려 앉자 물 정령은 제 도구를 잡은 채 한쪽 발로 흙을 밀었다. 물이 둥글게 돌아 새싹 옆에 잠깐 머물렀다. 샘 위에서는 물통을 진 동료들이 그가 손을 들어 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갈대밭 쪽 길을 먼저 가리키고, 마지막 정령은 동쪽 깃발 아래에 남겼다.
“많이 주면 안 돼.”
“그래서 돌아가게 했잖아.”
“누가 파도 된댔어?”
“땅을 얕게 긁는 건 돼. 어제 네 선배도 그랬어. 말뚝 심으려고.”
타오는 물길을 손으로 막았다. 손끝이 차가워지며 가는 김이 났다. 물 정령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래에 가지 마.”
타오는 물 정령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한 구간의 흙이 유난히 단단했다. 물 정령은 돌추 하나를 그곳에 세우고, 다른 끈의 돌추와 높이를 맞췄다. 푸른 눈이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거기 파면 여기까지 다 쏟아져.”
타오는 물을 막았던 손을 뗐다. 물 정령은 물길 옆에 작은 돌을 놓아 방향을 틀었다.
“여울이라고 해. 어제 네 통 뒤에 있었어.”
타오는 어제 루온과 손짓을 나누던 정령을 떠올렸다. 루온이 작은 물통을 먼저 채우려고 하자 긴 통 세 개를 가리키던 정령이었다.
“물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고 했지?”
“받는 데가 셋이니까.”
여울은 아래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가지 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거기부터 저 아래 갈대밭까지 이어야 해.”
“샘에 오면 되잖아.”
“네 다리로 하루야. 이제 막 깨어난 애들은 더 걸려.”
여울이 허리에서 접은 잎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물기 어린 흙이 담겨 있었다. 새싹 옆의 흙과 색이 달랐다. 붉은 갈색이었다. 마른 부분을 손끝으로 누르자 가루가 떨어졌다.
타오는 무슨 말을 하려다 다시 새싹을 보았다. 물길은 그 바로 밑을 향하고 있었다.
여울도 같은 곳을 보았다.
“옮겨야 할 수도 있어.”
“싫어.”
“아직 뿌리가 길지 않을 때 흙째 떠서—”
“여기서 났잖아.”
“아래 것도 거기서 났어.”
여울은 잎을 다시 접었다. 손가락 사이로 작은 흙 알갱이 하나가 떨어졌다. 그는 그것까지 주워 넣었다.
타오는 새싹 옆에 무릎을 붙이고 앉았다. 여울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파던 길을 멈추고, 돌추 셋을 회수해 허리춤에 걸었다. 갈대 매듭이 달린 끈은 그보다 조금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내일도 올 거야?”
타오가 물었다.
“네가 안 와도.”
여울이 일어났다. 남은 물은 얕은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마루가 쌓아 놓은 흙 앞에서 멈췄다.
타오는 손끝으로 그 흙을 조금 밀었다. 물이 한 방울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살폈다. 새싹은 쓰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