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LEMENTAL FRONTIER · 2화
“저쪽에서 보면 덜 막혀.”
목소리는 위에서 났다.
타오는 새싹을 가린 가지를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세 번째로 옮겨 놓은 돌이 자꾸 굴러가는 탓에 팔까지 빌려야 했다. 루온이 보면 길을 살피는 데 팔을 다 쓴다고 할 것 같았다.
머리 위 가지에 바람 정령이 걸터앉아 있었다. 머리칼 끝이 한 방향으로 누웠다가 일어났다. 한쪽 어깨에 자루를 두 개 메고, 다른 쪽 어깨에는 구부러진 나뭇가지를 걸었다. 나뭇가지에는 매듭이 여러 개 묶여 있었다.
“나한테 하는 말이야?”
“저 돌. 이쪽 뿌리에 걸치면 되잖아.”
“그럼 마루가 또 옮겨.”
바람 정령은 가지를 따라 두 걸음 옮기더니 뒤로 내려왔다. 자루가 새싹 가까이 흔들렸다. 타오가 팔꿈치로 막자 바람 정령은 얼른 자루를 품에 안았다.
“앗. 미안.”
그는 땅에 닿기 전에 낮은 가지 끝을 한 손으로 당겼다. 타오가 받치던 무게가 가벼워졌다. 바람 정령은 나무껍질을 접어 가지 사이에 끼웠다. 좁지만 빛이 지나는 틈이 생겼다.
“세이.”
그가 말했다.
“알아. 바람 쪽에서 제일 늦게 내려오는 애.”
“아래에서 올라오니까 늦지.”
능선의 끈이 짧게 흔들렸다. 세이는 손가락을 두 개 펴 보인 뒤 오른쪽 가지를 가리켰다. 위에 있던 바람 정령 둘이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세이는 자루 하나를 풀었다. 각기 다른 잎으로 싼 작은 꾸러미들이 있었다. 꾸러미마다 매듭 모양이 달랐다. 타오는 반짝이는 날개가 달린 씨앗 하나를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따뜻한 손으론 안 돼?”
타오가 제 손바닥을 펴 보이며 물었다.
“이건 괜찮아. 저 붉은 건 내가 집어 줄게.”
타오는 날개 달린 씨앗을 손바닥에 올렸다. 세이가 입김을 조금 불었다. 씨앗이 빙그르르 돌다 타오의 손목에 내려앉았다.
“다 어디로 가져가?”
“큰 고개 너머.”
“거기 뭐가 있는데?”
“빈 땅. 물 고이는 골짜기. 밤엔 흙이 좀 차가워. 너희가 와 주면 좋고.”
“우리도?”
“누가 돌을 데워?”
세이는 타오의 손바닥에서 씨앗을 받아 도로 쌌다. 매듭을 두 번 확인하고 자루 안쪽에 넣었다.
“넓어?”
“뛰다가 멈출 곳을 골라도 될 만큼.”
타오는 고향의 빈터 끝에 줄지어 앉아 있던 어린 정령들을 떠올렸다. 한쪽은 돌이 뜨겁고 한쪽은 그늘이 져서, 가운데 자리 하나를 놓고 다투던 얼굴들이었다.
세이는 주머니에서 닳은 돌조각을 꺼냈다. 손톱 같은 선이 세 개 그어져 있었다. 그는 조금 웃으며 돌에 새 선을 하나 더 긋다가 그만두었다.
“우리 막내가 기다려. 네 번째 자루 가져간다고 했거든.”
“그럼 빨리 가지.”
“위에서 못 지나가게 해.”
능선에 걸린 긴 끈이 보였다. 끈 아래로 나무들이 서로 기대어 있었다. 세이의 나뭇가지에는 옷자락과 씨앗 자루가 걸려 찢긴 곳을 표시한 매듭이 묶여 있었다.
“나 하나면 비집고 가. 저쪽에서 거꾸로 오는 애들도 있으니까.”
타오는 저 길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돌아올 때도 같은 길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방금 했다.
세이가 일어나 새싹을 살폈다.
“얘도 저 너머에서 잘 자랄 텐데.”
“여기도 잘 자랄 거야.”
“그럴 수도 있지.”
세이는 붙어 있는 잎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여기가 마음에 안 들면?”
“싹이 어떻게 가?”
“내가 있잖아.”
타오는 대답 대신 세이가 끼워 놓은 나무껍질을 만졌다. 가지가 조금 들리면서 아래쪽의 작은 구멍 하나가 드러나 있었다. 마루가 이끼를 덮어 준 집이었다. 틈으로 바람이 들어가 이끼를 흔들었다.
“저기서는 자고 있어.”
세이는 허리를 숙였다. 바람이 닿는 곳에 손을 놓더니 나무껍질의 각도를 고쳤다. 빛의 틈은 조금 좁아졌다. 이끼는 더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타오는 구멍과 새싹을 번갈아 보았다.
“해가 움직이면?”
세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잎들이 빽빽했다.
“그때 또 고쳐야지.”
그는 아침 내내 거기 있지 않았다. 큰 나무의 그림자가 흰 돌 끝에 닿기 전, 아래쪽에서 올 어린 정령을 마중하러 갔다. 타오는 그가 가져가다 말고 돌려놓은 작은 돌을 보았다. 뿌리 아래 구멍을 가리는 돌이었다.
저녁에 타오는 새싹 이야기를 했다.
단은 물을 많이 주면 빨리 클 것이라고 했다. 모아는 이름을 붙이면 빨리 큰다고 했다. 둘은 새싹도 불을 쓸 줄 아느냐고 물었고, 타오는 모른다고 했다. 여태껏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루온은 저녁 동안 낫을 갈았다. 타오가 여울의 물길 이야기를 하자 손을 멈췄다.
“어디까지 팠다고?”
타오는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샘을 그렸다. 뿌리 세 줄과 갈라지는 두 길을 그렸다. 새싹은 마지막에 찍었다. 루온은 그 점을 손가락 끝으로 만졌다.
“동쪽으로 돌리면 이 아래가 전부 물길이 된다.”
“새싹은 옮긴대요.”
“네가 옮겨 달랬느냐?”
타오는 고개를 저었다.
루온은 바닥의 그림 옆으로 선 하나를 더 그었다. 가지를 열어 빛이 들어올 방향이었다. 타오는 그 선이 마음에 들었다. 새싹이 그 가운데 있었다.
“우리 빈터에 마루가 왔었어요?”
“땅 정령?”
“네.”
“누군가는 왔겠지. 돌을 고르고 흙을 잡아 준 건 그들이니까.”
“그런데 왜 여기는 못 열게 해요?”
루온은 낫날을 엄지로 살폈다. 손끝이 붉게 빛났다.
“그들도 우리 빈터는 좋아할 거다. 자기 집을 그렇게 바꾸지만 않는다면.”
단이 킥 웃었다. 모아는 웃지 않았다.
“우리 집도 바뀌었잖아요.”
모아가 말했다. 루온은 낫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타오는 모아가 전에는 어디 살았는지 몰랐다. 모아는 새 빈터의 가운데 돌을 좋아했고, 거기서 남보다 늦게 일어났다. 타오는 모아가 거기서 깨어난 줄 알았다.
“그때 네가 싫다고 했던 것, 기억한다.”
루온이 말했다.
“지금은요?”
“지금은 네가 그 돌을 좋아하는 것도 안다.”
모아는 불꽃이 붙은 손톱을 무릎에 문질렀다.
“그래도 전에는 더 일찍 해가 들었어요. 바위 위로 바로.”
루온은 흙바닥의 선을 잠시 보았다. 그러고는 낫을 다시 집었다.
“내일 새싹을 보자.”
그날 밤 타오는 해가 드는 순서를 생각하다 잠들었다. 누구의 집에는 먼저 들고, 누구의 집에는 나중에 드는지. 나무를 조금만 옮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눈을 감았다.
루온이 새싹을 보러 온 날은 물통이 네 번 부딪쳤다.
세 번째 소리가 끝났을 때도 여울은 샘 가장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루는 물길 위에 돌 하나를 놓았고, 여울은 그것을 집어 옆으로 옮겼다. 세이는 올라가는 길의 낮은 가지에 끈을 묶었다. 마루가 그 매듭을 풀었다. 루온은 말없이 자신의 낫을 흰 돌 바깥에 내려놓았다.
“오래 끌면 아래부터 마른다.”
여울이 말했다.
마루는 손에 든 돌을 놓지 않았다.
“이걸 옮기면 뿌리 밑으로 파야 해. 위를 돌아.”
“네가 말한 위쪽은 물이 못 올라가.”
“그럼 더 돌아가.”
여울이 허리의 끈을 풀어 바닥에 늘어놓았다. 흙바닥에 돌추 셋이 닿고, 그 옆에 갈대 매듭이 놓였다. 그가 끈을 하나씩 옮길 때마다 타오는 여울이 새싹을 옮기려던 자리를 알 수 있었다. 그곳만 지나면 낮은 숲까지 큰 뿌리를 자르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루온은 낮은 가지를 눌렀다. 세이가 그 위에서 묶다 만 끈을 당겼다.
“그건 남겨.”
마루가 말했다.
“죽은 가지다.”
루온이 손톱으로 껍질을 벗겼다. 마른 속이 드러났다.
“저기까지는 살아 있어.”
마루가 더 위를 가리켰다.
“거기까지 가겠다고 안 했다.”
“아랫가지 하나 치우고 나면 윗가지 그늘이 남잖아.”
타오는 그 말을 자기도 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세이는 묶다 만 끈을 손에 감았다.
“정령 하나 지날 폭도 안 돼. 마주 오면 한쪽이 매달려 있어야 해.”
“지금 네가 서 있잖아.”
“나는 건너갈 때마다 돌아오기도 해.”
세이가 짧게 대꾸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타오는 루온의 손을 잡아당겼다.
“얘는 여기예요.”
루온이 몸을 숙였다. 새싹은 비탈에서 날마다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잎 끝이 전보다 벌어졌지만 아직 가운데는 닫혀 있었다.
“봐라.”
루온이 말했다.
“이 그늘에서도 자라려고 하지 않느냐.”
마루가 무릎을 꿇고 새싹 밑의 가는 뿌리를 받쳤다. 루온이 누른 가지를 놓자 가지 끝이 다시 내려왔다.
여울은 새싹 곁에 멈춘 물을 손끝으로 밀어 아래쪽 홈에 이었다.
“저 아래까지 가야 해. 여기 젖었다고 다 된 게 아니야.”
세이가 가지 사이로 손을 뻗었다. 막 끼워 넣었던 나무껍질이 보였다. 그는 비어 있는 다른 손바닥을 새싹 옆에 대어 크기를 재고, 능선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타오는 새싹을 바라보았다. 나흘 동안 보아 온 것 중 가장 커 보였다. 그리고 가장 작은 것 같았다. 네 정령의 손이 한꺼번에 내려오자 그는 가지 아래에서 뒤로 물러나야 했다.
루온은 먼저 일어났다.
“오늘 낮까지 우리 쪽으로 답을 보내라. 이 아래를 열겠다. 샘을 막지는 않겠다.”
“내 뿌리 아래는 네 땅이 아니야.”
마루가 말했다.
“물길도 네 것만은 아니지.”
여울이 받았다.
세이는 매듭을 다시 묶었다. 끈은 낮은 가지 두 개 사이를 팽팽하게 가로질렀다.
“나는 저 길을 내야 해.”
네 번째 통 소리가 났다. 타오는 흰 돌 바깥의 검을 주웠다. 여울도 허리춤에 짧은 칼을 꽂았고, 마루는 나무 옆에 기대 둔 창을 가져갔다. 세이는 높은 가지로 올라갔다.
타오가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새싹 옆에는 돌 네 개가 놓여 있었다. 누구의 돌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